환경디자인 전문가로서 오랜기간 동안 간판디자인 컨설팅 및 옥외광고디자인 연구 등을 수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느낀 간판의 현주소와 더 나은 경관을 위해 나아가야 할 간판디자인 방향에 대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이미선 한국옥외광고센터 연구조사부 책임연구원) ※ 필자의 원고는 월간 <사인문화>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 지역의 정체성이 나타난 다양한 간판 사례들.
지역 정체성의 정의와 개념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은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로 규정된다. 쉽게 말하면,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대상의 고유한 성질 및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역 정체성(地域正體性)은 지역의 정치나 경제, 문화적 특성 따위가 가지는 본연의 성질이며(네이버 국어사전), 학술적으로는 지역적 특성과 함께 지역민과 지역사회의 관계(Relathionshop)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이영원, 2014). 도시 분야에서 지역의 정체성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져 왔으나, 오늘날 기술·통신 등의 발전으로 세계화·국제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도시경쟁력 강화 수단의 일부로서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다. 다른 곳과 구별되는 그 장소만의 독특한 개성 및 특성의 유무가 도시의 장기적인 생존과 직결될 만큼 중요한 부분이 된 것이다. 도시디자인이나 환경디자인의 측면에서 볼 때 지역 정체성은 더 가시적(可視的, visible) 측면에 집중해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해당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건축양식이나 형태, 스카이라인, 랜드마크, 경관색채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들은 지역 정체성을 이루는 유·무형 요소 중 유형 요소, 그중에서도 인공 경관 요소이며 간판도 그중 하나에 해당한다.
옥외광고물과 지역정체성 옥외광고물은 지역경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유형의 인공 요소 중 하나이면서, 일반적으로 중요하거나 핵심적인 영향을 수행한다. 뉴욕의 타임스퀘어(Times Square), 런던의 피카딜리서커스(Piccadilly Circus), 오사카의 도톤보리(Dotonbori)는 세계적인 옥외광고물이 있는 곳이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옥외광고물을 활용해 지역의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마케팅한 아주 좋은 사례들이다. 이곳들에서는 옥외광고물이 장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소로 기능하고 있다. 화려한 옥외광고물 자체가 곧 지역정체성인 곳 외에 그 장소만의 고유한 경관 특성을 일관성 있게 나타내는데 간판이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사례들도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도시 교토(Kyoto)의 경우, 경관이 공공재산이라는 인식과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역사적인 거리와 가옥들을 보존하여 교토다움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교토를 ‘풍치지구’로 지정하였으며, 조례(1972년) 및 신경관정책(2007년) 등을 통해 정체성 유지를 위한 지침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 지침에는 건축물 높이나 형태뿐만 아니라 교토에 어울리는 옥외광고물 조성을 위한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옥상간판 및 점멸식 조명이 부착된 간판의 설치금지, 간판의 크기 및 색채 등에 대한 기준 등이다. 제아무리 유명 프랜차이즈 간판이라도 교토에서는 경관과 어울리는 색으로 간판을 설치하여 설치하여야 하는데, 대체로 눈에 두드러지는 원색 대신 전통가옥 및 경관과 어울리는 차분한 저채도 색채로 대체하여 사용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교토는 오랜 시간 동안 고유의 지역 정체성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도시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지속적으로 많은 관광객과 방문객을 유치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포르투갈 리스본이 있다. 포르투갈은 아줄레주(Ajulejo) 라는 푸른빛의 독특한 타일로 유명하며, 일반 가정집뿐만 아니라 상점, 레스토랑 등 다양한 건축물의 소재로 적극 사용되고 있다. 특히 리스본 도시 곳곳에서는 아줄레주를 사용한 경관 요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건축물 외벽은 물론 담장, 전차, 간판 등 다양한 도시 구성요소에 아줄레주를 활용한 디자인이 적용되어 지역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간판의 경우, 아줄레주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모자이크 타일이라는 기법을 차용하여 다양하게 디자인하기도 한다. 모자이크 타일은 여러 조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타일의 크기나 형태, 색 등에 의해 밀도 있고 풍부한 이미지의 연출이나 아기자기한 표현 등이 가능하다. 아줄레주나 모자이크 타일을 사용한 상점 외관의 장식, 간판 등은 그 매장의 특성은 물론 리스본이라고 하는 지역의 정체성까지 한 번에 담아낼 수 있는 아주 좋은 디자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러한 작은 노력들이 모여 지역의 일관된 특성과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것이 곧 지역 이미지가 되어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간판과 지역정체성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지역정체성을 위해 어떤 옥외광고물 디자인을 하고 있을까? 우리나라도 고유한 정체성이 남아있는 장소들을 발굴하거나 보존하는 다양한 정책들을 펼쳐가며 전통적인 경관이 그대로 또는 현대적인 요소와 잘 조화되며 존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시 내에서 비교적 역사·문화적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종로구의 경우 서울시 도심부 관리 기본계획(2000), 서울 도심부 발전계획(2004), 문화도시 10개년 기본계획(2015), 2020 도시기본계획, 북촌 가꾸기 사업 등을 통해 보존 및 관리의 필요성이 있는 곳을 정책 차원으로 유지·관리·활용 하고자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경관계획을 통해 경관 특성에 따라 권역을 구분하고 각 권역에 어울리는 옥외광고물의 소재 및 색채 등을 제안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문화재나 전통 건축물이 밀집된 보존권역은 전통적·자연적·역사적인 이미지로 조성하기 위해 전통적이고 자연적인 소재와 중저명도 중저채도의 안정적인 색채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정체성을 잘 보존해야 하는 장소 주변의 간판들이 여전히 주변과 조화되지 않는 화려하고 어지러운 색채, 이질적인 소재를 사용하고 있어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 정체성과 장소적 특수성을 고려하기 위해 옥외광고물에 적용한 특별한 시도도 있다. 서울의 광화문과 인사동 일대에는 프랜차이즈 간판을 포함한 모든 간판에 외국어가 아닌 한글을 사용하는 거리가 있다. ‘한글 가온길’이라고 불리는 이 거리는 2013년 한글창제 570주년을 맞아 형성되었으며, 광화문 광장에서부터 약 2.5km 이어져 있다. 이 거리에 설치된 간판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STARBUCKS’가 ‘스타벅스’로, ‘OLIVE YOUNG’이 ‘올리브영’으로, ‘GODIVA’가 ‘고디바’ 등으로 기입되어 있다. 역사적·문화적 거리라는 장소적 특성을 고려할 때 매우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경관 이미지와 간판 디자인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 없이 단지 영문을 한글로 바꾸는 것만으로 일관된 지역의 정체성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까? 지역이나 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간판개선사업의 주된 목적은 ‘낡고 노후화된 간판정비’ 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언제나 중요하게 고려되는 부분 중 하나는 ‘지역과 장소의 정체성 드러내기’이다. 간판개선사업을 담당하는 지자체 공무원은 물론이고 디자이너, 자문위원 등 간판개선사업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만의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잘 보여줄 수 있는 디자인 컨셉(Design Concept)을 정하고, 컨셉에 맞는 점포별 간판시안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의 결과가 늘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다. 정체성(Identity)이란 오랜 시간에 걸쳐 켜켜이 쌓여 자연스럽게 존재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역 마케팅을 위해 일차원적으로 만들어진 디자인 요소가 정체성으로 포장되고, 억지로 짜맞춘 디자인 컨셉 위에서 단편적이고 장식적인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사례가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지역의 정체성을 반영했다고 주장하는 많은 경관 사업, 간판개선사업의 결과들이 깊이감 없이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그저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습으로 마무리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역별로 훌륭한 자연환경, 역사·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더라도 상업지역의 모습이 대체로 비슷해 보이는 데에는 지역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배제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정체성을 위한 간판 디자인 방법 지역의 정체성은 단편적으로 설명하거나 특정 대상물 또는 개체로 치환하여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오랜 시간 겹겹이 쌓여 있는 시·공간의 층위가 녹아져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한 지역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홍보나 마케팅 요소가 아닌 그 지역의 진짜 역사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반영되어 정체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간판 디자인을 하려면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고 또 어떤 점을 주의하여야 할까? 첫째, 간판 디자인의 컨셉이나 정체성을 일차원적인 상징물이나 캐릭터 등으로 단순히 치환하여 반복적으로 사용하려는 접근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간판개선사업 컨설팅하다 보면 ‘장미’, ‘물고기’, ‘축구’, ‘고양이’ 등 특정한 사물이나 대상을 디자인 컨셉으로 설정하는 경우를 매우 자주 볼 수 있다. 이렇게 설정한 디자인 컨셉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안에 지역과 관련된 깊은 스토리텔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컨셉에 대한 다양한 접근보다는 컨셉으로 설정한 대상물을 단순히 간판개선사업 구간 전체에 걸쳐 유사한 위치, 동일한 방식으로 패턴화하여 반복적으로 적용하는 일차원적이 디자인이 나오기 쉽고 거리 경관이 매우 단순하고 획일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지역의 마케팅 수단으로 개발된 대상물을 패턴화시켜 거리 전체에 적용하는 방식은 지역의 정체성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지양하자. 대신 진짜 그 장소만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디테일한 스토리텔링을 하자. 둘째, 지역의 인공환경·자연환경 등의 특성을 분석하고 이미지에 적합한 간판의 색채 범주(Color Scheme)를 계획하여야 한다. 간판은 여러 디자인 요소의 조합이지만, 그중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인지되는 것은 ‘색(Color)’이다. 앞서 언급한 교토는 간판에 외래 표기법을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간판의 색을 교토 거리에 어울리는 안정적인 저채도 색으로 바꾸어 간판이 교토 거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였다. 반대로 간판에 고유언어만 사용하더라도 간판의 색채가 건축물, 시설물, 환경 등의 고유한 색채 범주를 많이 벗어나 어울리지 않게 된다면 그 장소는 일관치 않고 어지럽게 느껴질 것이다. 이런 거리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디자인 초기부터 그 장소에 어울리는 색채 범주와 색채 팔레트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옥외광고물의 색을 선정하는 체계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셋째, 장소에서 유지하고 보존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분류가 필요하다. 지역에는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해 온 역사 깊은 간판이나 경관 요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유행이나 트렌드에 맞지 않더라도 오래된 간판들은 그 자체로 그 지역의 정체성을 갖는다. 종종 대규모 간판개선사업 시 옆 간판들과의 조화문제 때문에 혹은 점포주 스스로 간판에 대한 가치를 모르고 새 간판으로 정비를 원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자체 담당자, 디자이너, MP 등 전문가 등은 그 지역에서 가치있는 간판을 찾아내고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넷째, 간판이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도시경관을 구성하는 데 있어 간판을 포함한 옥외광고물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간판 역시 수많은 도시경관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간판은 항상 건축물, 가로, 거리와 조화되어야 하며 그 자체로 눈에 지나치게 두드러지거나 주인공처럼 보여서는 곤란하다. 건축물과 조화되는, 한데 어우러지는 간판 디자인을 할 때 그 가로의 정체성이 생겨난다. 다섯째, 종합적인 경관계획 측면에서 간판 디자인을 접근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담당하는 관련 부서가 제각기 다르다. 예를 들면 건축물은 건축과, 가로시설물은 가로시설물과. 그 외에 도로과, 시설과 등이 이에 해당한다. 현황이 이러하다 보니 도시를 정비하거나 계획함에 있어 통합적인 이미지가 필요하지만, 담당 부서별로 협조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사업 시기 등이 맞지 않아 서로의 사업에 시너지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 지역의 이미지는 도시를 이루는 여러 경관 요소가 한데 합쳐져 형성된다. 도시디자인의 전체적인 맥락과 흐름 속에서 간판디자인을 할 때 보다 효과적인 정체성 있는 경관조성이 가능할 것이다.